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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평대군

가문을 빛낸 인물

유() 1645(인조 23)~1721(경종 1)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천(鹿川), 시호는 혜정(惠定). 대군의 10대손이며 증 영의정 중휘(重輝)의 아들 이다. 1668년(현종 9)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정언•지평•설서•응교•교리•병조좌랑•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성천부사•양주목사등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백성들의 이해를 살펴서 해로운 것은 혁파하고 이로운 것은 새로 시행하는 선정을 베풀어 도처에 선정비가 남아 있다.

예조참판이 되어서는 왕대비가 승하하자 고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승지, 강원도•경상도•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기사환국(己巳煥局) 때에는 대사간으로서 송시열을 탄핵하지 않았다 하여 전직 되었다가 벼슬에서 물러나 교외에서 지냈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후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도 승지•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한성판윤을 역임하고 호조•형조•병조판서를 지내고 1703 (숙종 29)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중앙관제 일부를 개혁하였다.

1704년(숙종 30) 우의정에 오르고 1707년(숙종 33) 좌의정에 승진되어 내의원 도제조를 겸임하였다. 1712년 (숙종 38)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정승 재임 중에는 공의 청렴결백한 성품과 의론이 명백하고 공명정대한 정치수완을 발휘하여 국정을 쇄신하는 데 크게 공헌하여 명상으로 추앙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치적을 추려 보면 이러했다.
백골징포(白骨徵布)라는 세리(稅吏)의 폐단을 없애고, 단종대왕 때의 충신의 설원과 을사사화 때의 명신들의 복작과 포증을 건의, 시행토록 하였으며, 궁금의 법도를 엄하게 하여 환관의 폐단을 없애고 붕당이 나라를 해친다 하여 이를 해소하는 데 주력하고 유현들을 예우하고 전주(銓注)에 있어서는 엄정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하여 국방정책에 주력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북한산성의 축조도 공의 강력한 건의로 이루어진 것이다. 북한산 성을 축조할 때 어명으로 도제조(都提調)가 되어 이를 담당, 완성하였다. 지금의 지하철 1호선의 녹천역은 북한산성을 축조하기 위하여 공이 상주하여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창동역은 산성을 축조하는 데 쓰여질 기자재의 창고가 있던 곳이라 연유하여 ‘창동’이라는 지명이 붙여진 것이라 한다.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선영에 세워져 있는 세장비는 공이 역대 선조들의 묘 위치를 잘 알 수 있도록 기록하여 세운 것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1718년(숙종 44) 영중추부사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1721년(경종 1) 77세로 별세하니 조정에서 ‘혜정(惠定)’의 시호를 내리고 후에 경종대왕 묘정에 배향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임좌에 있다. 묘지명은 기원(杞園) 어유봉(魚有鳳: 1673~1744)이, 신도비명은 도암(陶菴) 이재(李縡: 1678~1746)가 찬했다.

지연(止淵) 1777(정조 1) ~ 1841(헌종 7)

자는 경진(景進), 호는 희곡(希谷), 시호는 문익(文翼). 대군의 14대손이며 참판의열(義悅)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도량이 넓고 생각이 깊으며 총오(聰悟)가 절륜(絶倫)하였다. 약관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업성취가 뛰어나 사우들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1805년 (순조 5)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증광 문과에 급제, 이듬해 또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여러 사람의 부러움과 칭송을 받았다. 승문원에 보직되었다가 이어서 주서에 임명되었는데 공의 학식과 덕망이 인정되어 경연관이 되었다. 그 후 청환직을 두루 거쳐 도승지• 형조참판을 거쳐 형조•이조•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837년 (헌종 3)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실록청 총재관이 되어 <순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해 영의정과 좌의정이 사직함으로써 홀로 상신자리에 있었는데 이 때 상감이 유충(幼沖)하여 대왕대비가 수렴청정하고 있었으며 공은 3정승의 역할을 다하였다. 1840년(헌종6)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둠과 동시에 우의정에서 물러나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우의정 재임기간(1837~1840)의 일록(日錄)을 써서 남겨 당시의 정정 (政情)과 사회상황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로써 높이 평가되고 있다. 판중추부사가 되자 공을 시기하는 반대파에서 “희곡이 3정승의 자리를 혼자 맡아 정권을 전횡하였다.”고 누차 탄핵 상소하여 함경도 명천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공은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이 유배길에 올라 배소에 도착하여서도 집에서 하던 대로 종일 단좌하고 주역을 강독하며 문집 두권을 수사(手寫)하였다.

1841년(헌종 7) 배소에서 별세하니 춘추 65세였다. 공의 부음이 전해지자 왕은 신원하고 예장을 명하고 ‘문익(文翼) 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공은 뜻이 깊고 풍채가 응중 (凝重)하며 성품이 정량강명(貞亮剛明) 하였다. 선악의 분별과 의리의 판단에는 일도양단(一刀兩斷)의 엄연함이 있어 낭묘(廊廟:의정부)에 서면 연로한 정승이라도 그를 움직일 수 없는 기상이 있었다. 왕의 두터운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생사를 가리지 않고 시종일관 치국보민에 있는 힘을 다하였다. 시폐(時弊)를 말하면 반드시 구할 방침을 말하였으나 조경(躁競)한 무리들은 그의 형적(形跡)을 엿보고 방해함에 마침내 그는 모함을 당하였다.
저서로는 <희곡일록(希谷日錄)>외 <희곡유고(希谷遺稿)> 8권이 있다.
묘소는 장단 동도면 고읍리 임좌에 있다. 묘지명은 이조판서 김학성(金學性: 1807~?), 묘갈명은 영의정 조두순(趙斗淳:1796~1870), 신도명은 홍재철(洪在喆)이 찬하였다.

후원(厚源) 1598(선조 31) ~ 1660(현종 1)

자는 사심(士深), 호는 오재(迂齋) 또는 남항거사(南港居士), 시호는 충정(忠貞). 대군의 7대손이며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욱(郁)의 아들이다.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문인(門人)이다.

1623년(인조 1)에 인조반정에 참여,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지고 태인현감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출전하여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에 임명되고 병자호란 때에는 척화(斥和)를 강력히 주장, “오랑캐에게 욕을 당하기보다는 온 국민이 힘껏 싸우다 힘이 모자라면 임금은 사직을 위하여 몸을 바치고 신하는 임금을 위하여 죽으면 유감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1637년(인조 15) 승지가 되고 이어 강화유수를 거쳐 대사간을 역임, 1648년(인조 26)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다. 1649년 효종대왕이 즉위하자 공을 서울로 불러 북벌의 의논을 하고 그 주축이 되게 하였다. 이를 김자점(金自點:?~1651)이 청나라에 밀고하여 갖은 곤욕을 겪기도 하였다. 대사성•호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1655년(효종 6) 예조판서 로서 추쇄도감(推刷都監) 제조(提調)가 되어 전국의 노비를 추쇄(推刷), 강화를 방비케 하였으며 장악원(掌樂院)에 소장되어 있던<악학궤범(樂學軌範)>을 고쳐 간행하여 사고 에 나누어 소장케 하였다. 호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공의 성품과 재기가 뛰어남을 안 효종대왕은 주사(舟師:수군)의 총책을 겸임케 하였다. 이에따라 공은 북벌 때 쓰일 전함 200척을 만들어 어사(御史)를 초치, 대열함(大閱艦)을 갖게 하니 신임이 더욱 두터워져 북벌의 대임을 관장케 하였다.

매양 조회에 모의가 있으면 군신에 앞서 공의 자문을 받고 공의 주청을 모두 들어 주었다. 판의금부사• 좌참찬을 거쳐 1657년(효종 8) 우의정에 올라 북벌의 준비를 위하여 더욱 군비를 확충하고 군량을 비축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유능한 인재를 발탁하여 당대의 명망이 높은 송시열(宋時烈:1607~1689)을 이조판서에, 송준길(宋浚吉:1606~1672)을 병조판서에, 장재이완(李浣:1602~1674)을 훈련대장에 추천하여 임명케 하였다. 1659년(효종 10) 북벌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가운데 큰 가뭄이 들어 모든 곡식이 말라 죽고 모도 내지 못하게 되었다. 임금은 “하느님도 어찌 이다지 무심인가. 이 나라를 버리고자 하는 것인가.” 하고 친히 제단에 나가 고유문을 올리고 북벌의 차질이 올까 걱정을 하였다. 하늘도 감동 되었는지 별안간 사방에서 먹구름이 모여 들어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온 조정이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하는 지극한 정성의 덕분’ 이라 하고 임금에게 비를 피하도록 청하였으나 “하늘이 주시는 은혜로운 비다. 하늘이 이 나라를 도우시는 것이라.”고 기뻐 호곡하며 움직이지 않는지라 “비가 찹니다.”

“옥체에 해가 되십니다.” 하여도 움직이지 않고 세찬 비를 맞다가 몇 시간 후에 대내에 들었다. 효종대왕은 당시 북벌 계획을 추진하느라 밤낮으로 과로한 데다 등창까지 난 상태에서 찬 비를 몇시간 맞고 나니 감기까지 겹치게 되어 병세가 악화 되었다. 침전에 든 효종대왕은 공과 송시열을 한번 쳐다보고 승하하였다.

이듬해 1660년(현종 1) 공이 별세하여 북벌계획은 일장춘몽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조정에서 ‘충정(忠貞)’의 시호를 내리고 광주 수곡서원(秀谷書院)에 배향케 하였다. 저서로는 <우재집(迂齋集)>이 있고 외조부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 1532~1607)의 글을 편저한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안산밖 지곡(池谷) 자좌에 있다. 묘지명은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찬하고, 신도비명은 문정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찬하였다.

구익(求益) 1552(명종7)~1620(광해군 12)

자는 계진(季進), 호는 퇴휴당(退休堂). 대군의 5대손이며 증 좌승지 척(惕)의 아들이다. 대학자로서 성정(性情)이 청렴‧강직하여 광해군 때 유일(遺逸)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부수(副率)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하였고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아들 유일(惟一)‧유길(惟吉)‧유달(惟達)‧유명(惟明) 4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묘소는 충남 당진군 송산면 무수리 간좌에 있다.

의건(義健) 1533(중종 28)~1621(광해군 13)

자는 의중(宜中), 호는 동은(峒隱). 대군의 5대손으로 시문과 글씨에 뛰어나 상공(相公) 리경석(李景奭)과 상공 신흠(申欽:1566~1628)은 ‘동은 선생의 시문은 도연명‧소동파와 겨눌 수 있고 글씨는 왕희지와 같은 명필이며 깊고 그윽한 학문, 염담 고결한 행의(行誼)는 ‘동방의 현인’으로 받들어 진다.’고 <동은집(峒隱集)> 서문에서 서술하고 있다. 공은 벼슬에서 뜻이 없어 일제 과시(科試)에는 응하지 않았으나 대부인 명으로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응시, 급제하여 돈녕부 직장이 되었으나 대부인이 별세하자 곧 사퇴하였다. 그 후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추천으로 공조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산자수명한 포천군 영평 백운산 아래 초정(草亭)에서 산수와 벗하며 학문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영의정 박순(朴淳:1523~1589)이 찾아와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유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이때 박상공(朴相公)이 남기고 간 시는 이러하다.

“길이 밭 사이로 접어들자 말이 겨우 지나가고(路入田間絻過馬)
초정은 석양 붉은 빛속에 기울어져 있다.(草亭傾側夕陽紅)
왕손은 돌아오지 않았는데 봄이 먼저 가버려(王孫末到春先去)
꽃이 낙시터에 떨어지고 소의 물빛은 텅 빈 것 같다.(花落釣台漂累空)”

공은 모든 사람이 바라는 권세와 명예와 인연을 끊고 당대의 명현(名賢) 이이(李珥)‧성혼(成渾)‧정철(鄭澈:1536~1593)‧송인(宋寅:1517~1584)‧윤근수(尹根壽:1537~1616)‧ 정작(鄭碏, 1533~1603)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하여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백사 이항복(李恒福:1556~1618)‧상촌 신흠(申欽:1566~1628) 등은 공의 높은 덕과 학문을 흠모하여 자주 교류하였다.
공은 효성이 지극하여 온 정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위독할 때 은어를 잡숫고 싶어 하였으나 은어 나올 철이 아니라 구해 올리지 못하였다. 그리고 별세하자 공은 이 때부터 은어만 보면 눈물을 흘리고 종신토록 은어를 입에 대지 않았다. 공은 한의학에도 통달하여 약물과 음식을 상비하였다가 위급한 환자를 구해 주었으며, 어려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며 일생을 깨끗하고 의롭게 살다가 1621년 (광해군 13)향년 81세로 별세하였다. 전국의 선비들이 공의 높은 덕과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수곡서원(秀谷書院)과 옥병서원(玉屛書院) 을 건립하여 배향하니 조정에서는 사액(賜額)의 은전을 내렸다.
옥병서원은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주원리에 현존하고 있어 매년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에 유림들이 모여 제향을 받들고 있다.
공의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에 있으며, 묘비명은 상공 신흠, 묘지명은 상공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지었다.
유고로<동은집(峒隱集)>이 있다.

유성(惟聖) 1581(선조14)~1627(인조 5)

자는 시중(時中), 호는 사천(沙川). 대군의 6대손이며 현감 정필(廷弼)의 아들이다.
찰방(察訪)으로서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직을 역임학고 승지에 이르렀다.
묘소는 영평(永平) 선영 갑좌에 있다.

유홍(惟弘) 1567(명종 22)~1619(광해군 11)

자는 대중(大中), 호는 간정(艮庭). 대군의 6대손이며 영춘현감 정필(庭弼)의 아들이다.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급제, 주서‧정언‧병조정랑‧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03년(선조 36) 평안도 암행어사가 되어 민정을 살펴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훌륭한 일은 포상하여 관기를 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어서 영천군수‧죽산부사를 거쳐 병조좌랑에 이어 부제학이 되어 경연에 참가했다. 이듬해 예조참의‧병조참지에 이르렀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파직된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의 일당이라는 탄핵을 받고 강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순천으로 이배, 배소에서 별세하였다.
인조반정 후 설원, 복관과 아울러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유고로 문집 <간정집(艮庭集)>이 있다.

성중(成中) 1706(숙종 32)~ 1760(영조 36)

자는 사득(士得), 시호는 정민(貞敏). 대군의 12대손이며 예조참판 제(濟)의 손자이고 현감 현모(顯謨)의 아들이다. 진사시를 거쳐 1735년(영조 1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청환직을 두루 거쳐 평안도 관찰사‧부제학에 이어 호조판서‧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유고가 있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수계면 거촌 임좌에 있다.

치중(致中) 1726(영조2)~1802(순조2)

자는 치화(稚和), 호는 불용재(不用齋), 대군의 12대손이며 수찬 증 이조판서 현망(顯望)의 아들이다. 1750년(영조 26) 생원시에 급제, 1760년(영조 36) 감제시(柑製試)에 장원 급제, 1761년(영조 37)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임명되고 이어서 대교 설서를 거쳐 1766년(영조 42) 홍문관 교리가 되어 매사를 처리하는데 공명정대하고 논조가 명확하고 행의가 바르니 임금은 “참으로 가상하다, 빙청 옥결(氷淸 玉潔) 같도다. 큰 일을 맡길 만하다.” 하고 암행어사에 임명하고 문제가 있는 함경도 지방과영남지방의 민정을 살피고 관기를 숙정 (肅正)하는 어명을 내렸다. 당시 함경도 지방에는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 당지에 이르러 모든 사정을 살피고 우선 정부 양곡을 풀어주고 그 고장의 지주와 부호들을 효유(曉諭: 깨닫도록 일러줌)하여 양곡을 모아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굶주림을 면하게 하여주고 감영의 의옥(疑獄)3건을 바르게 다스려 주니 고을에서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영남지방에 가서는 탐관오리를 응징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의 한을 풀어주니 영남 유생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임금께 아뢰니 임금은 크게 기뻐하고 승지에 임명하였다. 1775년(영조 51)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는 소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청황제가 공의 인격‧논리‧능력에 감복하여 청나라 제일의 화가를 불러 공이 영정을 그리게 하여 선물 을 하였다.(현재 종손이 보관하고 있음) 1793년(정조 17)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춘추가 70이 되자 치사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미좌에 있다.

의필(義弼) 1738(영조 14)~1808(순조 8)

초휘는 상악(商岳), 자는 양백(亮伯), 호는 창계(蒼溪), 녹천상공 유(濡)의 증손이며 대사간 존중(存中)의 아들이다.
천성이 단정하며 너그럽고 편안하였으며 학문이 깊어 중망이 높았다. 일찍이 감제(柑製)에 응하였는데, 시관이 공의 명성을 듣고 장원을 뽑으려 한다며 음밀히 공의 의중을 타진하는지라, 공이 불쾌하여 시권을 거두어 가지고 나왔다. 그 후 1766년(영조 42) 정시문과에 급제하자 영조대왕은 공을 인견하고 부친 존중이 대사간으로 있을 때 바른 말을 하다가 모함을 받아 유배된 사건을 잊으라는 뜻으로 ‘망석척용(忘昔滌用)’ 이라고 하교하자, 공이 “신의 아비는 임금을 섬기되 숨김이 없고, 충성을 다하되 은휘함이 없었는데, 상께서 하교하시니 신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하고 고향 묘려(墓廬)에 퇴거하여 있는데 10년간 누차 높은 벼슬을 내리며 나오라 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자, 임금은 일소(馹召)를 명하니 공이 알현하고 아뢰기를 “신의 아비가 위국진층(爲國盡忠)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인데 지난날 ‘망석척용’ 넉자를 하교하시니 사람의 자식된 자 차마 들을 수 없었습니다. 충신은 효자문에서 구한다 하였습니다. 신의 불초함으로써 어찌 임금을 섬기겠습니까.” 하니 임금은 ‘네 말이 옳다. 희언(戱言)을 어찌 이다지 고집하는가.” 하며 의주로 가도록 교지를 내리지 공이 드디어 출사하여 강유(講儒)‧ 수무(修武)‧집법평윤(執法平允)하니 임금은 “가상하다. 어진 아비의 그 자식이로다. 내 이제 서북쪽의 근심을 잊게되었다.”고 하였다. 그 후 양양 등 여섯 곳의 지방관을 역임하고 여러 청환직을 거쳐 부제학에 이어 우참찬에 이르렀다.
공은 벼슬길에 나와 정2품 참찬에 이르기까지 성품이 강직하고 청백하여 권력과 부귀에 아부하지 않고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공명정대하게 봉사하였기에 명예로운 청백리에 선정되어 모든 관리의 모범이 되었다.
유고로 <창계집(蒼溪集)>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남면 신산리 유좌에 있다.

기연(紀淵) 1783(정조 7) ~ 1858(철종 9)

자는 경국(景國), 호는 해곡(海谷). 대군의 14대손이며 참판 의열(義悅)의 아들이다. 우의정 지연(止淵)의 아우이다.
1805년(순조 5) 별시문과에 급제, 정자가 되고 1822년(순조 22) 대사성에 이어 이조참의‧한성부좌윤‧강원도 관찰사 등을 거쳐 1833년(순조 33) 우승지‧공조판서, 1835년(헌종 1) 우참찬에 올랐다.
이듬해 평안도 관찰사, 1837년(헌종 3) 대사헌에 등용, 이어 예조판서로 안핵사를 겸임, 다음 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849년(헌종 15) 한성판윤, 황해도 병마절도사‧경상도 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봉조하에 이르렀다. 묘소는 장단선영 자좌이다.

목연(穆淵) 1785(정조 9) ~ 1854(철종 5)

자는 백춘(伯春), 호는 소소(笑笑), 시호는 문정(文貞). 대군의 14대손이며 증 판서의상(義常)의 아들이다. 1821년(순조 21) 정시 문과에 급제, 1827년(순조 27) 사헌부지평이 되고, 그 후 이조참의‧승지‧이조참판‧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1843년(헌종 9)동지사 겸 사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47년(헌종 13) 대사헌으로서 조병현(趙秉鉉)을 탄핵한 상소문중 익종에 대한 불경한 어구가 있다 하여 임자도에 안치된 뒤 무주에 양이(量移) 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나왔다. 1851년(철종 2) 형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광주유수‧ 호조판서‧전라도 관찰사‧ 대사헌 등을 역임, 1854년(철종 5) 치사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동년 12월에 별세하니 향년 70세이다.

지연(志淵) 1766(영조 42) ~ 1852(철종 3)

자는 심일(心一), 대군의 14대손이며, 동몽교관 의윤(義胤)의 계자로 생부는 현감 의술(義述)이다.
1805년(순조 5) 증광 문과에 급제, 참판‧판서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인천시 구월동 경좌에 있다.

인명(寅命) 1819(순조19) ~ 1887(고종 24)

자는 기영(祈永), 시호는 효헌(孝献). 대군의 15대손이며, 용궁공(龍宮公) 일연(一淵)의 아들로서 문정공(文貞公) 목연(穆淵)에게 입후하였다. 1858년(철종 9) 생원으로서 정시 문과에 급제, 1862년 (철종 13) 경상우도 암행어사로 나아갔고 1863년(철종14) 지평에 올라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청환직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에 승진, 1884년 (고종 21) 예조판서로서 복제의 개혁으로 소매의 폭을 줄인 ‘좁은 소매 옷 입으라’는 영에 반대 상소를 했다가 만경에 유배, 배소에서 별세했다. 사후에 신원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건하(乾夏) 1835(헌종 1) ~?

자는 대시(大始), 대군의 16대손이며 인하(寅和)의 아들로 인우(寅禹)에게 입후 하였다. 1864년(고종 1) 증광 문과에 급제, 부교리‧장령을 거쳐 공조참의‧대사성‧좌승지‧이조참의‧ 성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879년(고종 16) 예조참판‧부총관‧동지돈녕부사를 지냈고 이어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고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1896년 중추원 의관‧내의원경‧비서원경을 역임했다. 1899년(광무 3) 내부대신 양지아문 총재를 거쳐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1905년(광무 9) 충청도 관찰사에 나아갔다가 이어 중추원 의장을 거쳐 궁내부 특진관에 이르렀다. 명관으로서 이름이 높았다. 외직으로 있을 때는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도처에 남아 있다.

경하(景夏) 1811(순조 11) ~ 1891(고종 28)

자는 여회(汝會),시호는 양숙(襄肅). 대군의 16대손이며 병사 인달(寅達)의 아들이다.
조부 복연(復淵), 부(父) 인달, 형 원하(元夏)에 이어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직을 두루 거쳐 1863년 고종태황제가 즉위하자 훈련대장 겸 좌포도대장이 되고 이어서 금위대장을 역임하고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기보연해순무사(畿輔沿海巡撫使)에 임명되어 유명한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 함대를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한성판윤‧형조판서‧강화유수‧어영대장‧무위도통사‧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82년(고종 19) 무위대장으로 임오군란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뒤, 전라도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1884년(고종 21) 풀려나와 좌포도대장이 되고 이어서 후영사를 역임하고 관계가 보국숭록대부에 이르러 돈녕부 판사로 올랐다.
공은 대원군의 깊은 신임을 받던 무장으로서 주로 군사‧경찰권을 장악하여 치안유지와 양이(洋夷)를 물리치는 데 크게 공헌하여 그 위세가 삼천리 강산에 떨쳤다 한다.
공이 살던 동네가 낙동이어서 ‘낙동염라’라는 별칭이 있었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때에는 조대비‧명성태황후‧세자(순종) 등이 공의 아들 범진(範晉)의 집에 피난하기도 했다. 묘소는 양주 노원 내곡동 자좌에 있다.

돈하(敦夏) 1824(순조24)~1895(고종 32)

자는 서오(敍五), 호는 동운(峒雲), 대군의 16대손이며 현감 인승(寅升)의 아들이다.
1868년(고종 5)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청원직을 두루 거쳐 판서‧우참찬을 역임 하였다.

범진(範晉) 1853(철종 4)~ 1911

자는 성삼(聖三), 대군의 17대손이며 판동녕 경하(景夏)의 아들이다. 1879년(고종16)식년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887년(고종 24) 협판내무부사가 되었다. 1895년(고종 32) 농상공부협판으로서 대신 서리가 되었으나, 을미사변으로 친일파가 정권을 잡음으로써 파면되자 불안‧공포에 처한 국왕을 궐외로 이어(移御)케 하고 국모의 복수를 하기 위하여 친일 내각을 타도하고 정부를 개조하여 시국을 수습하고자 춘생문(春生門) 사건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러시아에 망명했다. 이듬해 귀국, 러시아 공사 웨베르 ‧리재순‧이완용 등과 함께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김홍집‧어윤중 등 친일파를 몰아내고 새로운 내각의 법부대신 겸 경무사 되었다.
그 뒤 미국‧러시아‧프랑스‧오스트리아‧독일 등의 공사(公使)를 역임하였다. 1905년(광무 9)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친일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러시아에 망명하여 국권회복에 힘썼다. 1907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고종태황제가 파견한 밀사 이상설‧리준이 러시아 수도에 도착하자 차자(次子) 위종(瑋鍾)을 같이 가게 하고 공은 모든 것을 주선하여 주었다. 헤이그에서 러시아 대표의 알선으로 각국 신문기자에게 일본의 비행을 알리고 영‧불‧로어 등 외국어에 유창한 리위종이 연설한 뒤 회의에 참석코자 하였던 바, 일제의 방해로 밀사 세 사람은 회의장 밖으로 축출되니 리준은 분사하고 일은 좌절되었다. 일제는 공이 이면 활동한 것을 탐지하고 국내에 있는 공의 장자를 헌병대에 감금하고 가혹한 고문을 가하여 폐인이 되어 죽게하였다. 마침내 한일병탄을 당하니 이역에서 이 소식을 듣고 ‘나라가 망하니 살아 무엇하리.” 하고 권총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위종(瑋鍾) 1887(고종 24)~?

외교관, 독립운동가, 대군의 18대손이며 판돈녕 경하의 손자이고 법부대신 범진(範晉)의 차남이다. 7세 때부터 부친이 공사로 다니는 곳마다 따라다녀 영‧불‧로등 외국어가 유창하였다. 1906년(광무 10) 주러시아공사인 부친 범진 밑에서 참사관으로 봉직하였으며, 1907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고종태황제의 밀명을 받고 이상설‧리준과 함께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헤이그에 가서 러시아대표의 주선으로 만국기자협회에 한국의 억울한 처지와 일본의 야만적 침략을 공박, 청중의 경청과 갈채를 받으면서 세계 여론에 호소했다. 우리 사절이 투숙한 호텔에는 태극기를 걸고 당당히 활약하였다. 이어서 회의장에 참석코자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축출을 당하니 리준은 분사하고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때 일본정부는 이들 3인에 대한 궐석재판을 본국에서 열고 종신징역을 선고하고 체포령을 내리자, 이미 순국한 리준을 헤이그에 안장하고 이상설과 함께 페테르부르크,런던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가 그 후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다시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생애를 구국운동에 바쳤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鐵騎 李範奭 將軍 철기 이범석 장군

철기(鐵騎) 이범석장군은 불세출(不世出)의 애국자이며 탁월한 군략가였다. 또한 시‧서‧화‧악(樂)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문무겸전의 훌륭한 지도자였다. 돌이켜보면, 이범석장군은 한반도를 향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야욕이 차츰 노골화하기 시작한 1900년 10월 20일 서울에서 태어난 전주이씨 광평대군 십칠대손 (全州李氏 廣平大君 17代孫)이다. 경향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고 의열사(義烈士)는 죽음으로써 항거하였으나 국운(國運)은 끝내 만회되지 못하였다 1915년, 장군은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의 수학을 중단하고, 홀로 중국 망명 길을 떠났으니, 그때 그의 나이 불과 16세였다.

1919년, 장군은 중국 운남군관학교(雲南軍官學校) 제12기 기병과를 졸업하고, 멀리 조국강산을 진동한 3.1 독립만세 소리를 들으며 만주 벌판으로 달려갔다. 거기에서 장군은 처음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 學校) 교관으로 나중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교관으로 취임하여 독립군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0년, 적은 재만(在滿) 한국독립군을 섬멸하기 위하여 국내와 시베리아로부터 대부대를 동원, 청산리 (靑山里), 백운평(白雲坪) 일대로 진격하였다.

장군은 김좌진(金佐鎭) 장군 휘하의 제2제대장(梯隊長)으로서, 이 엄청난 적과 맞서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좌진 장군의 군모가 날아가고 이범석장군의 군도(軍刀)가 부러지는 격전 끝에, 적은 3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이는 나라 잃은지 10년만에 거둔 가장 통쾌한 승리이며, 온 겨레의 뜨거운 감격 이었다. 이에 적은 병력과 장비의 압도적 우세로 만주 전역에 걸친 일대보복전을 전개하여 재만 동포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감행하였다. 각지의 독립군은 북상하여 밀산(密山)에 집결, 대한독립군단을 편성, 노령 연해주(沿海州)로 이동하였다. 그 후 독립군은 이른바 자유시 참변(自由市 慘變)으로 다시 만주로 돌아와 독립군 진영을 재편성하였다. 1925년 장군은 고려혁명군 결사단을 조직하여 만주 각지를 전전(轉戰) 하였으나 독립군 진영을 재편성하였다.

1925년 장군은 고려혁명군 결사단을 조직하여 만주 각지를 전전(轉戰)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29년 외몽고에 들어가 눈보라치는 자연 속에서 수렵생활을 하였다. 그의 웅휘하고 서정적인 문학작품은 주로 이 때에 쓰여진 것이다.
1931년 일제가 소위 만주사변을 도발하여 중국 침략을 본격화 하자 장군은 마점산(馬占山) 장군의 참모로서 대흥안령(大興安領)을 중심으로 다시 적군과 맞서서 싸웠다. 그 후 장군은 마점산을 따라 소련 경유 구라파 시찰길에 올랐다. 구라파에서 돌아온 장군은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선생의 부름을 받고 중국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부설 한적군관대(韓籍軍官隊) 대장에 취임하여 독립운동 진영의 재무장(再武裝)을 위한 기간요원(基幹要員) 양성에 힘썼다.
1941년 광복군(光復軍) 창설에 즈음하여, 장군은 초대 참모장의 중임을 맡고 건군대업(建軍大業)에 참획(參劃)하였다. 그 후 장군은 일선 지휘의 책임을 맡고 광복군 제2지대장에 전임(轉任)하여 서안(西安)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전방공작을 전개하였다. 한편, 장군은 미군과의 합작하에 본토수복 작전계획을 세우고, 대원의 훈련에 전념하였다. 예정된 모든 훈련과정을 마치고 출동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것은 장군에 있어서는 감격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통한(痛恨)이었다.
임시정부는 곧 장군을 광복군 참모장으로 복귀시키고, 국내 정진군(挺進軍) 사령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정세는 장군으로 하여금 비무장의 한 시민 자격으로 환국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였다. 이 때 장군의 나이 46세, 고국을 떠난 지 28년 만의 감격적인 귀국이었다. 장군이 그렇게도 그리던 조국 땅을 밟았을 때, 장군의 가슴에는 번쩍거리는 단 하나의 훈장도, 그리고 고국의 향기 그윽한 단 한 다발의 꽃도 없었다.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오직 두 동강이 난 강토와 난마(亂麻)와 같은 어지러움 뿐이었다. 그 혼돈 속에서 장군은 ‘민족지상 (民族至上)’ ‘국가지상(國家至上)’ 의 기치를 내세우고 조선민족청년단을 창건하였다.

우리는 한줄기 단군의 피다.

죽어도 또 죽어도 겨레요 나라
내뻗치는 정성 앞에 거칠 것 없다.
천지에 깃을 치는 보라매들아
바람 차고 눈 셀수록 때 한창 좋다.
늦을라 어서 바삐 깃발을 따라

이 가락이 방방곡곡에 울려 퍼질 때 전국 청년들은 장군 곁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장군은 친히 푸른 옷, 푸른 모자에 푸른 띠를 두르고 젊은이들의 앞장을 섰다. 이와 같은 장군의 확고한 의지, 결연한 모습은 혼란 속에 표류하던 많은 젊은이들에게 십자성 같은 길잡이가 되었다. 참으로 민족청년단의 창설은 장군이 해방 후 이땅에 남긴 불후의 기념비였다. 1948년 정부 수립에 있어서 장군은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에 피임되어, 건국의 주춧돌을 놓았다. 특히 그가 거친 벌판에 끼친 건군(建軍)의 자취는 길이 이 땅의 국방사에 아로새겨지리라. 1952년 장군은 정당정치의 구현을 위하여 자유당 창당에 참가하고, 동당 부총재로 추대되었다. 4.19의거 이후 최초로 실시된 참의원 선거에서 장군은 충청남도에 출마하여 최고 득점자로 당선되었다. 1963년, 재야 제정당이 통합하여 ‘국민의 당’을 창설함에 있어서, 장군은 동당 최고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국내 정세는 복잡하게 얽히고 계파간의 갈등 또한 심화되어 장군의 이상과 현실은 점차 벌어졌다. 그는 드디어 정치의 일선에서 물러서서 ‘국토통일’ 이외의 모든 공직을 사퇴하고, 초탈(超脫)의 경지에서 세속(世俗)을 관망하였다. 그 뉘라 짐작하였으리오, 그처럼 강건하던 장군이 마치 그 자신이 ‘우등불’에서 묘사한 바와 같이, 한 오리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표연히 이승을 떠날 줄이야! 1972년 5월 11일, 그는 갑작스러운 심장 질환으로 성모병원에서 돌아가니, 향년 72세였다.
새삼 그 웅대한 기골, 활달한 풍모가 떠오른다. 그러나 우리가 두고두고 장군을 흠모하는 것은 그의 민족독립을 위한 헌신적 투쟁과 건국에 끼친 빛나는 공적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한 인간으로서의 따뜻한 정감(情感)과 풍류(風流)에 마음이 끌리기 때문이다. 장군은 성품이 뇌락(磊落)하여 한 점 구름도 남김이 없었다. 불의 앞에 서는 분연히 일어섰으나, 불쌍한 정경 앞에서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던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전장에서는 적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기던 억센 손이, 전원에서는 촌부의 노고를 어루 만지는 부드러운 손길로 변했다. 장군은 병마공총(兵馬倥摠)의 틈바구니에서도 소설과 시를 쓰는 서정과 낭만을 간직하였다.

나는 통나무 장작을 피워 놓고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바라보는 것이 제일 좋아

하던 회고담에서, 우리는 몽고의 광야를 달리던 장군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는 동시에, 그 황량한 환경에서도 조약돌처럼 잔잔히 속삭이던 시정(詩情)을 읽을 수 있다. 귀국 후의 다사다난 한 생활 속에서도 그는 때때로 붓을 잡고, 때때로 음률(音律)에 심취하였다. 독한 술을 즐겨 마시고, 말을 달리고, 사냥을 하면서 남은 정열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장군은 운명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꿋꿋한 지사의 절의(節義), 늠름한 장부의 기개(氣槪)를 지녔었다. 그러면서도 자상한 할아버지, 훈훈한 인간의 정을 잃지 않았다.
이와같은 장군(將軍)이었기에 서거(逝去) 하신지 28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로 하여금 장군(將軍)을 잊을 수 없게 하며 믿음직스러운 모습이 더욱 그리워진다.

松峴 李範俊 將軍 송현 리범준 장군

송현 리범준 장군은 세종대왕 제5왕자이신 광평대군 17대손이다.
1928년 음력 2월 그믐날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송현리 해발 750m나 되는 두메산골에서 아버지 정하 (政夏)공과 어머니 수안김씨(遂安金氏)의 2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섯 살 때부터 3년 간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였으며 아홉 살 때 집에서 4km나 되는 정선군 임계 심상소학교에 입학 신학문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2학년 때 강릉시 성산면 산북리로 이사하여 2km 거리인 성산 심상소학교로 전학하고 그 학교에서 졸업하였으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평양에서 사업을 하시는 외종조부(김기현: 金基鉉)의 지원과 돌봐주심에 힘입어 평양 광성중학교(5학년제)로 진학하게 되었다.
1945년 졸업 후 서울에 있는 일본인 회사 경성 토목회사에 취직하여 근무 중 세계제2차대전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전이 되고 8.15 조국광복을 맞이하였으나 나라에는 지도자가 없고 국민은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어져 이념의 대립이 심각하여 질서가 무너져 가는 상태에서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절망 속에 마침내 미군의 지원으로 장차 이 나라 국군의 모체가 될 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된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인 강릉에 내려갔다. 마침 조선국방경비대 제8연대 창설요원을 모병중에 있어 장차국군의 간부가 되어 국방을 튼튼히 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큰 포부로 46년 9월에 지원 입대하였으나 년령 미달 (당시 18세)로 육사 입교는 무산되고 병으로 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부모님의 결정으로 11월 평생을 함께하는 최종순 여사와 결혼했다.
신혼의 달콤한 꿈을 누릴 새도 없이 뜻하지 않은 불행이 찾아왔다. 47년 4월경 군기병 하사로 근무 중(당시 대대장 송요찬) 부산 제5연대에서 창설 기간요원으로 강릉에 온 선임 하사관이 중심이 되어 대대장 배척 무장폭동사건’이 발생되었다. 군기병으로서 사전에 예방을 못했다는 책임으로 6개월 간 영창생활에 이등병 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행운은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사병의 질적 향상을 목적으로 사병 진급시험제도가 시행된 것이다. 제일 우수한 성적으로 진급한 사병은 매월 진급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된 것이다.

최선을 다한 결과 4개월만에 이등병에서 일등중사로 진급되어 연대본부 보급과에서 근무하던 중 당시 연대보급관 황필주 대위의 주선으로 육사8기후보생 시험에 응시하게 되었다. (1948년 5월)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8연대에서 19명이 응시하였으나 혼자만 합격하는 기쁨을 듬뿍 안은 것이다.

1949년은 가장 소중한 해였다고 장군은 말한다.
1949년은 5월 23일 국방장관의 우등상장을 받은 우등생으로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되어 강릉에서 창설한 제8사단 10연대에 부임하였는데 당시 송요찬 연대장은 초급장교들의 전투 경험을 시킨다는 이유로 동기생 53명을 장교소대로 편성, 군번이 빠르다는 이유로 장교소대 소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오대산에서 준동하고 있는 공비토벌 전투에 참가시켰다. 마침 오대산 북쪽 매복령에서 무장공비 10여명과 조우(遭遇: 맞딱뜨림)하여 적은 섬멸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장군은 육사 8기중 제1호 전상자(戰傷者)가 되었다. 강릉 도립병원에서 20여일간 입원치료를 받고 퇴원하여 6월 20일 제1대대 2중대 소대장으로(서림에서 38선 경비) 배치되어 복무를 하다가 7월 15일 소위에서 중위로 특진(우등상 수상자만) 8월 15일 대대 작전장교로 보직되고 고향에서 9월 16일 첫아들을 얻었다는 희소식과 11월 3일 연대근무 중대장으로(강릉 연대본부) 발령되는 등 입대 당시의 꿈이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6.25 북한 인민군의 기습남침으로 나라의 운명이 걸린 민족상잔이 벌어졌다. 우리 국군은 예기치 않았던 북한공산군의 기습남침으로 중과부적이라 하는 수 없이 지연전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후퇴 경로는 강릉에서부터 제천, 단양, 안동, 안강, 포항, 영천 그리고 그 유명한 다부동 전투까지 참전하고 있던 중 마침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이 대한민국을 구출하기 위하여 참전함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북진통일의 대망을 품고, 서울, 개성, 곡산, 양덕, 맹산, 영원, 평안북도 구장동으로 진격한 역전의 용사였다. 불고가사 (不顧家事), 불고처자(不顧妻子)하고 8사단 10연대에서만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으로 이 나라를 수호해야겠다는 일념에서 일진일퇴하면서 싸우고 또 싸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투 중 연대장과 부연대장이 동시에 전사하는 참담한 비보를 두 번이나 접하고도 그 분들을 구해내지 못한 슬픈 전사(戰史)를 남겼다고 장군은 회고한다.
53년 휴전 후 육군대학 정규과정을 수료하고 1관구, 5관구 사령부 군수참모, 정보참모를 거쳐 61년 대령으로 진급과 동시에 육군본부 군수참모부 보급과장으로 근무하던 중 62년 국가재건 최고회의 추천으로 월남 대통령 고문단으로 3개월간 파월, 월남의 남북전쟁 상황을 시찰하고 귀국후 국가재건 최고회의 감찰위원회 감찰위원으로 보직되기도 했다. 63년 보병 제11사단 제20연대장, 64년 육군 군수참모부 소요획득과장으로 근무하고 65년 3월 육군준장으로 진급 9월 1일 주월 맹호사단 부사단장 겸 군수지원단장, 66년 6월 1일 주월 한국군 제100군수사령부(십자성 부대) 창설과 동시에 초대사령관이 되었다.

68년 월남에서 귀국 보병 제15사단장, 70년 소장으로 진급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차장, 군사정전위원회 한국측 수석대표 등을 역임하면서 고려대학교 행정대학원 경영관리 과정과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국가정책발전 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74년 군수참모부장, 75년 육군 중장으로 진급되어 제2군단장, 77년 육군 군수사령관 국방부 방위산업차관보직에 근무 하면서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방위산업정책과정을 수료하는 등 장군은 배우면서 일하는 장군으로 높이 평가되기도 했다.
1980년 2월 22일 육군 중장으로 타의반 자의반으로 예편한 장군은 군(軍) 생활 37년을 회고하면, 주월한국군 제100군수 사령관 시설 한국군의 피복 및 개인장구류 일체를 국내에서 국산품으로 조달 한국기업의 월남진출 지원 등으로 1965년부터 1972년 사이 40억$의 외화획득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창원공단과 구미공단등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데 기여한 것이 가장 보람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국방부 방위산업차관보 시절 창원공업단지 건설과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육군의 전투장비 90%를 국산화에 성공, 해군함정 90% 국산화 성공, 공군의 지상장비 90% 국산화 성공, 지대지 미사일 기술개발 축척 등이 가장 보람있는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예편 후에도 제2대 해운항만청장, 11대 12대 국회의원, 제32대 교통부장관, 한국조폐공사 이사장, 사단법인 전주리씨 대동종약원 이사장, 학교법인 동아학숙(동아대) 이사장, 대한민국 헌정회 안보특보위원회 위원장, 사단법인 운경(雲耕)재단 이사장 등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 봉사하고 있다 이렇게 문무겸전(文武兼全)으로 금성화랑훈장, 충무무공훈장, 보국훈장 국선장, 을지무공훈장, 자유중국 수운휘훈장, 보국훈장 통일장, 자유중국대수경성훈장, 미국훈장 THE LEGION OF MERIT 등 수많은 수훈(受勳)은 장군의 영광이며 우리 가문을 빛낸 별이라고 하겠다.